신용회복경험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 나를 무너뜨릴 줄은 몰랐어요
- 최고관리자 오래 전 2025.04.16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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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입부: 가족과 일, 그 사이에서 최선을 다하며
저는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36세 간호사입니다. 워킹맘으로 유치원생, 초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며 매일 분주하게 살고 있어요. 남편과 저는 맞벌이를 하며, 아이들에게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직업상 밤을 새우는 날도 많고, 몸도 마음도 늘 바쁘지만, 퇴근 후 아이들이 “엄마 왔다!” 하며 달려올 때면 그게 제 하루의 보상이었죠. 경제적으로 빠듯하긴 해도 성실히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이의 조기유학 이야기가 시작됐어요.
2. 전개: 아이의 미래를 위한 무리한 선택
큰아이가 영어에 흥미를 느끼고, 주변에서도 조기유학을 다녀온 아이들이 많다 보니 저도 ‘조금만 힘내면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편과 고민 끝에 결정했고, 유학비용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학자금 명목의 대출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3천만 원이었지만, 생활비와 항공료, 현지 학원비 등이 겹치면서 카드론까지 쓰게 되었고, 어느 순간 채무는 8천만 원으로 불어났어요. 은행 2곳, 카드사 2곳에서 빚이 생겼고,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원리금만 해도 130만 원이 넘었습니다. 남편 수입도 빠듯하다 보니 결국 모든 부담이 제 어깨에 얹힌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는 매달 카드 돌려막기와 이자에 쫓기는 삶이 반복됐고, 병원 일에도 지장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건강검진 예약조차 미루며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3. 위기: 내 몸과 마음이 무너졌던 날
결정적인 계기는 제가 응급실 근무 중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날이었어요. 탈수 증세였지만, 그보다 더 무서웠던 건 의사 선생님이 “최근 스트레스 심하셨죠?”라고 물었을 때였어요. 그 순간, 제가 무너졌다는 걸 실감했어요.
그날 집에 돌아가 아이들 얼굴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뭘 위해 이렇게 버텨왔나, 아이를 위한 결정이었지만 이대로 가면 아이에게 짐만 남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서웠어요.
그 후, 인터넷을 뒤져가며 ‘개인회생’이라는 제도를 알게 되었고, 2주 정도를 고민하다 상담을 받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엔 정말 무서웠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자책감도 들고요. 하지만 상담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이건 포기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기 위한 제도라는 걸요.
4. 해결: 법적 보호 속에서 다시 세우는 삶
개인회생 상담 후 필요한 서류를 하나하나 준비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수입, 지출, 채무 내역을 정리하고 법원에 신청서를 냈고, 약 5개월 후 인가 결정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저는 매달 32만 원씩, 3년 동안 변제하는 계획으로 인가받았습니다. 총 채무액의 절반 이상이 탕감되는 조건이었어요. 처음엔 부끄럽고 눈물도 많이 났지만, 법원에 출석해서 다른 분들의 사연을 들으면서 ‘이 길이 나만 걷는 길이 아니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어요.
힘들었던 건 신용등급 하락과 생활의 제약이었지만, 오히려 신용카드 없이도 사는 법을 배우게 됐고, 가계부를 쓰며 소비 습관도 개선됐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게 가장 큰 변화예요.
5. 결말: 다시 내 아이들을 웃게 하기 위해
지금은 변제 시작한 지 1년 반 정도가 되었고, 한 번도 연체 없이 잘 갚아나가고 있어요. 병원 일에도 집중할 수 있고, 퇴근 후 아이들과 웃으며 밥 먹을 여유가 생겼어요. 남편도 제 결정을 존중해줬고, 함께 다시 미래를 그려가고 있습니다.
조기유학은 중단되었지만, 아이는 국내에서 잘 적응하고 있고, 저도 새로운 목표를 세웠어요. 언젠가는 간호사로서 국제 의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게 제 꿈이 됐습니다.
혹시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분이 있다면, 부디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개인회생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예요. 저처럼 가족을 위해 무리한 선택을 했던 분이라면, 꼭 한번 상담을 받아보시길 권해드려요.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잘 해낼 수 있습니다.